“내가 춤출 때 나는 춤을 출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문장은 다양한 이유로 무용을 사로잡았던 머스 커닝햄의 슬로건과 언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말은 언뜻 모더니즘의 허튼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춤에 고유한 본질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고, 그 자체로 어떤 실체인 춤이, 자기지시성과 매체특정성이 영웅주의처럼 승격되어 있는 근대 회화와 상통하며 결탁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마치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입지를 굳이 주장하거나 현현할 필요 없다는 듯 소극적 제스처나 부인의 제스처로 드러내기도 하는 영웅주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관념적이고 미니멀한 어떤 실천들이 사실은 견고한 이분법과 정체성에 관한 헤게모니를 쥔 지배적 재현 체제에서 탈피하려는 전략이라는 독해도 가능한데, 어쩌면 필수적인 독해일 수도 있다.
머스 커닝햄은 몇 차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추상적이고 요행적인 절차들을 선택한 것은 영웅적인 불가촉 남성 주체를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맨해튼의 (다소 보수적이거나 한) 업타운 무용계에 ‘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식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러나 저러나 작업의 드라마투르그적 얼개를 끌어내기 위해 우연적인 작동을 활용하거나 주역에 의지하는 것은 분명, 남성적 힘과 ‘절대적’ 통제의 가치를 드높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극적 긴장 및 제약적인 구성 형식들을 향해 엿을 날리는 행위다.
변형 의식 상태를 유발하는 (LSD, 피요트, 머시룸 등의) 마약들이 대중적으로 퍼지면서 두 가지 상이한 접근이 나타났다. 그 중에 더 잘 먹혔던 접근은 마약이 현실의 증강 체험을 창출하고 오감을 확장하여 우리 의식 안에 감춰진 영역에 접근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환각 상태는 이른바 진정한 자아에 접속하게 해주고 주체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반면 두번째는 이런 마약이 주체의 일시적 소멸, 자아의 소거를 통하여 나를 나로서 체험하는 일, 혹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이’ 나를 체험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를 인간 주체성이나 다른 주체성이 없는 실존 체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터 없는 세계, 심지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체험의 체험, 혹은 오직 오로지 체험.
커닝햄의 인생 동반자가 세계적인 머시룸 전문가였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하지 말고, 첫머리의 문장은 사람이 춤을 출 때 일종의 변형 의식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는 큰 의미임을 생각해보자. 제2의 시선에 접촉한 상태, 자아의 소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문장은 쉽게 ‘춤을 출 때면 눈앞에 굉장한 색깔들이 보인다’와 비슷한 말이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커닝햄은 자아 인식을 얻어내거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 수단으로서의 춤보다는(이는 70년대 초부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나를 완전히 놓아버릴 가능성을 믿는 것 같다. 말하자면 춤에 나를 맡기는 것. 주체성이나 관계성, 권력의 경계선에 제한 받지 않는 공간과 시간.
무용에서 자각/인식과 관계성을 선호하는 경향은 약 50년 전에 확립되었는데 그 기본 출발점은 바로 책임 있는 자유다. 개인은 자각 훈련을 하고 책임에 관한 합의점들을 도출해 이러한 기술을 가지고 창조적 선택과 새로운 경로 발견을 해낸다는 입장이다. 멋지기도 하고 유용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커닝햄과 아주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가. 인식의 성전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한다. 우리가 가진 장치들을 절대 내려놓지 않도록, 자아를 향한 시선을 절대 놓치지 않도록, 우리가 속속들이 이해하고 빠져나올 방법마저 알고 있는 미지가 아닌 미지에는 절대로 다다르지 않도록. 인식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지만 그 안에는 내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세상에 미칠 결과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기쁨이 함의되어 있다. 반면 커닝햄의 경우는 인식과 책임을 내려놓고 오로지 춤만을 추면서, 그 춤이 나 대신 그 책무를 질 거라 믿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 자신을 자유케 하는 문제, 특히 이런저런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체험에 관한 문제다. 잘 알다시피 덧없고 결코 포착되지 않는 그 체험.
여러 가지 전략을 들여다본다면 이 긴장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무용에서 널리 통용되는 모티프 하나는 즉흥이 무용수와 그 무용수의 주체에 자유의 감각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즉흥하는 댄서는 안무가의 명령이나 특정 무용 테크닉의 ‘규율’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아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이런 형태의 자유는 무용수가 매 순간 가능한 선택, 불가능한 선택, 가능한 결과, 불가능한 결과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고려하게 압박하는 자유 아닌가? 그 말은 곧 이 인식이라는 것에, 정말 매 순간마다 무엇이 ‘좋은’ 결정인지 알고 최적의 결과를 내는 능력이 함축돼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용에서 즉흥은 사실상 자유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 차라리 관리, 통제의 체험과 연관된다. 여기서 커닝햄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그는 즉흥 대신 정확한 규칙 모음을 구축하고 춤에 대해 기술적으로 꽤 팍팍한 이해법을 확립한다. 그런데 이 팍팍함이 의사 결정 따위에 사로잡힌 무용수를 풀어주는 기능을 하면서, 의식 상태에서 빠져나와 주체나 존재가 오롯이 춤에만 몰두하게 해주는 춤을 추구한다는 게 짐작이나 가능한 일일까.
즉흥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갖가지 책임을 끝없이 쌓아올린다. 언제나 좀 모호한 합의들(그렇지 않으면 자유라고 추정하고 있는 이 상태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에 기반한 것 같아 보이는 책임마저 쌓아올리는데, 여기서 커닝햄이 조건들을 뒤집는다. 그 시작은 개인의 책임 뿐 아니라 비-책임 또한 제거시키는 견고한 ‘시스템’이다. 조금 추상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즉흥은 다소 애매한, ‘존재하지 않는’ 구조들에 전략적인 경향이 있고 커닝햄의 개념은 오히려 모든 것에 열려있는 튼튼한 구조들, 전략의 교착 상태를 떨쳐버리는 구조들을 제시한다. 예술을 보는 관점과 관련한 정치적 층위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커닝햄은 형이상학과 영성을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즉흥은 조금 단정적으로 말하면 애틋한 포퓰리즘 쪽으로 치우친 신자유주의다.
또다른 렌즈로 보면 즉흥은 자유와 인식, 책임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면서 우리가 보다 능숙하게 인간으로 사는 연습, 혹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연습을 하는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즉흥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균질화하고 권력의 헤게모니들을 강화한다. 내가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는 한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하거나 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합의한 관습과 규범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 규범은 과연 누구의 규범인 걸까?
즉흥은 인간적이고 도덕주의적이다. 반면에 커닝햄은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인간되기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 평가를 위한 전제조건이나 의향 없이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 불변의 구조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내가 춤출 때 나는 춤을 출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곧 도덕주의와 잠재성을 맞바꾼 포스트휴먼적 실천이다.
머스 커닝햄이 했던 유명한 말이 또 하나 있는데, 춤은 우리에게 뭘 되돌려주지도 않고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으며 창작자에게 불멸을 선사할 만한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내용이다. 그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찰나의 순간 딱 하나 뿐”이라고 끝을 맺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관점을 하나 살펴야 하는데, 살아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잠에서 깨어 오늘을 살 준비가 됐다는, 내 개별적인 삶에서 상쾌한 시작을 맞는 그런 마음인가, 아니면 삶 자체 – 그러니까 이 거대한 삶과 생명 그 전체와 자체에 대한 체험을 말하는 건가? “내가 춤출 때 나는 춤을 출 뿐”이라는 과제에 임하는 이에게 그것은, 춤추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거대한 삶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